한 세기 가까이 웅장한 몸집을 뽐내며 수천만명의 목을 축였을 인공호수는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있었다.

말라간다는 말보다는 '죽어간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서부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걸친 미드호는 유명한 후버댐으로 생겨난 미국 최대의 인공호수다. 1930년대 콜로라도강을 막은 후버댐이 세워지자 그 배후에 거대한 미드호가 만들어졌다.

이 호수는 네바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 미국 서부 7개주와 멕시코 북부지역에까지 물을 공급하고, 미국 남서부 농업 지대의 젖줄이다.

척박한 미국 서부의 생명샘이었던 미드호는 그러나 점점 '죽음의 웅덩이'가 돼가고 있다.

'최대'라는 칭호를 단 미드호도 지난 20여년간 지속한 미국 서부의 대가뭄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탓이다.

2000년 7월 이 호수의 수위는 365m까지 올라가 최고치에 육박했다. 4일(현지시간) 기준 수위는 317m. 미드호에 물을 채운 1937년 4월 이후 가장 낮다.

대가뭄의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의심하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미드호에 가는 길목인 네바다주 사막의 소도시 볼더시티에 도착한 2일 낮 기온은 40도에 다다랐다. 호흡할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이 뜨거운 공기가 미드호를 서서히 말렸을 것이다.

볼더시티에서 바싹 메마른 적갈색 암벽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도로를 15분쯤 달리면 미드호의 모습이 드러난다.

대가뭄으로 미드호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협곡 암벽엔 분명한 흔적이 남았다.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암벽의 하얀 '욕조 링'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암벽의 하얀 '욕조 링'

(볼더시티=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서부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걸친 미드호의 물 빠진 흔적을 보여주는 하얀색 '욕조 링'을 협곡 암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2.8.8 jamin74@yna.co.kr

 

미드호를 둘러싼 암벽엔 하얀 띠가 층층이 그려졌다.

과거 물에 잠겼을 때 암벽에 달라붙은 물속의 미네랄 성분이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햇볕에 노출돼 변색한 하얀 흉터다.

후버댐 방문자 센터의 가이드 데이비드 리는 "마치 욕조에 낀 물때처럼 보이지 않느냐"며 "그래서 저 하얀 띠를 '욕조 링'(bathtub ring)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드호 협곡 암벽의 하얀 띠는 최고 수위에서 얼마나 물이 빠졌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며 "'욕조 링'은 미드호가 잃어버린 거대한 물의 양인 셈"이라고 말했다.

리 가이드는 "미드호를 비롯한 콜로라도강 수계에서 물을 공급받는 주민은 대략 4천만 명에 달하지만 기후변화로 미드호 수위가 줄면서 이들 주민이 물 부족 위기에 놓이게 됐다"고 했다.

미드호의 낮아진 수위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LA) 등 서부 주요 도시는 물부족 위기를 맞아 야외 잔디 물주기를 제한하는 등 고강도 절수 대책을 펴고 있다.

미드호 주변은 국립 휴양지로 지정됐을 만큼 아름다운 수변 자연광경을 뽐내는 곳이다.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미드호 주변의 버려진 보트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미드호 주변의 버려진 보트

(볼더시티=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 서부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걸친 미드호가 최저 수위로 떨어져 보트가 버려진 채 방치돼 있다. 2022.8.8 jamin74@yna.co.kr

 

하지만 이 휴양지는 이제 메말라가는 미드호의 극적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후변화의 현장이 됐다.

미드호 주변의 보트 선착장 6곳 중 5곳은 수위가 낮아지면서 폐쇄됐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현지 공원 관리인은 "해마다 물이 빠지면서 미드호 수변 지역의 모습이 달라지고 물놀이 환경도 크게 제약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리인은 "물이 마르면서 날카로운 민물 홍합 껍데기가 바닥에 흩어져있고 마치 갯벌과도 같은 진흙 지대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며 안전사고 예방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쩍쩍 갈라진 호수 주변이 단단하게 보여 걸어 들어갔다가 허벅지까지 쑥 빠지는 바람에 밖으로 나오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영업을 중단한 관광용 보트 선착장은 인적이 끊긴 채 적막했고, 배회하는 들개 떼가 황량함을 더했다.

미드호 수위가 크게 줄면서 침몰한 배와 사람 유해가 최근 잇따라 발견된다고 한다.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후버댐 다리에서 바라본 후버댐과 미드호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후버댐 다리에서 바라본 후버댐과 미드호

(볼더시티=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후버댐 다리 너머 역대 최저 수위로 떨어진 미드호가 펼쳐져 있다. 2022.8.8 jamin74@yna.co.kr

 

지난달 초에는 2차 세계대전 시절 건조된 상륙정 1척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 관심을 끌었다.

이 상륙정은 수심 56m 아래에 잠겨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륙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공원 레인저스와 낚시꾼 등에게 물어물어 발견 장소를 찾아갔다.

주변에서 낚시하던 주민 브랜던 씨는 "미드호 물이 줄면서 침몰한 상륙정이 발견된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유량이 줄면서 주변 풍경이 극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미드호가 최저 수위로 떨어지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호수가 '데드 풀'(Dead Pool·죽은 웅덩이)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미드호에서 발견된 2차 대전 당시 상륙정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미드호에서 발견된 2차 대전 당시 상륙정

(볼더시티=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서부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걸친 미드호 수위가 낮아지면서 호수에 침몰했던 2차대전 당시 상륙정이 발견됐다. 2022.8.8 jamin74@yna.co.kr

 

데드 풀은 댐의 배후에 있는 호수 수위가 너무 낮아져 하류로 물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수력 발전은 물론 물을 공급할 수 없는 웅덩이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미드호 수자원을 관리하는 미국 내무부 산하 개간국(USBR)은 수위가 273m 아래로 떨어지면 데드 풀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리 가이드는 "수력 발전용 터빈을 돌리려면 미드호 수위가 최소 1천 피트(약 305m)를 넘어야 한다"며 "현재는 미드호의 수량이 충분치 않아 발전용 터빈의 60%만 가동되고 있다"고 전했다.

유엔환경계획(UNEP)도 2일 미드호가 데드 풀이 될 위험에 처했다는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60% 수준으로 가동되는 수력발전용 터빈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60% 수준으로 가동되는 수력발전용 터빈

(볼더시티=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후버댐 방문자센터 가이드의 안내로 방문한 수력발전용 터빈. 현재 미드호 수위가 낮아지면서 60%만 가동되고 있다. 2022.8.8 jamin74@yna.co.kr

 

UNEP는 20년 넘게 이어진 서부 대가뭄으로 강수량이 감소하고 지표수가 증발했으며 기온 상승에 따른 물 사용량이 늘면서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을 미드호의 수위가 최저치가 된 이유로 지목했다.

UNEP의 생태계 전문가 리스 멀린 번하트는 콜로라도강 유역의 가뭄이 기후적으로 '뉴노멀' 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미드호는 가뭄과 물 수요 증가가 합쳐진 퍼펙트스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마리아 모가도 북미 생태계 담당관도 "단기적으로 물 공급과 수요를 관리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기후 변화가 문제의 핵심"이라며 "장기적으로 기후변화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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